90년대 컴퓨터 공학 이야기 (17) — 실험-빵판과 용산전자상가

인내심 이야기 (3)

학부 2학년 때 전공 필수 과목으로 실험이 있었고, 당시 논리설계 과목의 실습 버젼으로 하드웨어를 만지는 시간이었었다. AND / OR / NOT 등의 논리 게이트 를 전선에 연결해서 되는지 안 되는지의 실습 버젼이었고, 플립플롭 , PLA / PAL 등까지 cover 할 수 있었다. 컴퓨터 이외의 것으로 진행하는 실험이 처음이었어서 신기한 경험이었다. 선배들이 빵판이라 불렀고, 영어로 진짜 breadboard..

전원장치 일체형 브레드보드

요새 인터넷에서는 꽤 약식의 버젼들만 보이는데, 실험실에 있던 건 꽤 묵직한 제품이었다. 같은 조원들끼리 머리 맞대며 여러 칩들을 넣어 보고, 과제에서 지정하는 이것저것 해 보는 일들이었고, 논리설계 과목의 일환이어서 입력 스위치와 발광 다이오드까지가 출력의 끝이고, 원하는 입력에 책대로 논리가 구성이 되는지를 테스트하는 게 일반적인 수업의 구성이었다.

생각보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많이 필요했고, 전선의 피복을 너무 길거나 짧지 않게 잘 잘라서 연결하는 게 주요 이슈였다. 나중에 사회 생활 하면서는 그쪽도 공부가 필요했었더랬지만, 주로 Analog 쪽 이슈인 RLC circuit 은 고민 거리가 아니었고, 따라서 테스터도 전기가 흐르냐 아니냐의 0과 1의 상태들로만 관리했던 기억이다. 주로 합선이 일어날 때 빵판에서는 꽤 경쾌한 “삐” 소리들이 울려 퍼지기 일수였고, 처음에는 킥킥거리며 웃으며 시작하다가 복잡한 물건을 만질 수록 점점 신경질적이 되어 갔었다.

기말 프로젝트

학기말 과제로 스톱워치를 만드는 과제가 주어졌었다. start / stop 의 버튼 2개, 5명의 랩타임 저장, 시/분/초/0.01초까지 7자리. 설계를 같이 하고, 자리수를 나누어 분업을 하고 전선으로 연결하면 될 거 같은데 (당연히) 잘 안 된다. 외부 전원을 연결하면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당연히(?) 합선이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재수가 없이 오래 놓으면 기껏 구해 놓은 칩들이 타서 불량이 되기도 한다.

납땜(soldering) 을 하지 않고, wire-wrap 관련 기술들이 주 스킬이 되고, 인내심의 대부분은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전선을 너무 길지 않게 만들어 놓는 기술, 색깔을 다른 용도로 운영하는 기술, 나중에 디버깅이 수월하게 배치하는 layout 등의 일머리가 필요했고… 디버깅을 할 때는 선을 끊고, 다른 선을 추가로 연결하는 식으로 풀어 나가는데, 손을 떨지 않는 기술 등. 과제는 이틀 밤 사이에 10개의 디버깅을 통한 패치 이후에 완제품으로 제출에 성공했다. 인내심과 해피 엔딩, 새벽에 떠오르는 해를 보며 제출 후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갔던 훈훈한 기억이다.

용산전자상가 부품 구입

지금과 아주 다르게 생긴 용산 전자상가가 있었고, 기말 과제용 부품을 구입하러 전자상가에 꽤 여러 날을 돌아다녔었다. 아마 선인상가라고 불렸던 거 같고, 지금에야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그만이지만, 당시 길을 잘못 들면 컴퓨터 대리점으로 가게 되는 등 역시 서울이란.. 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던 동네들이긴 하다.

실험 제출용 부품들을 sheet 에서 펼쳐 놓고, flip flop 같은 것들 살 것들을 적어 놓고, 가서 하나씩 뒤지고, 전선과 wrapping socket은 다른 친구들과 공동구매하고, 꽤 비쌌어서 가격 네고도 꽤 하고 했던 기억이다. 74AC74 — Dual D Flip-Flop 4개 사는 대신 74AC374 — Octal D-Type Flip-Flop 하나를 산다든지 등의 비용 효율화도 일어나고 있었고, 아래는 지금 봐도 여전히 비싼 소켓들이다.

여전히 비싼 소켓들. 다리 하나에 100원 이상

ps. 조교 생활

대학원 때(1997, 1998) 이 과목의 실험 조교를 2년동안 했었다. 그래서 96, 97 학번 후배님들과 조금 더 인연이 있겠고, 학기 말에 종강 파티 명목으로 학과 예산으로 맛난 맥주를 먹었던 기억들이 있다. 몇몇 친구들은 유명인이 되어 종종 이야기 들리는데, 부디 좋은 기억의 일부였으면 하는 뒤늦은 아쉬움들이 조금 있다. 특히 마지막에 한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 후배가 했던 ‘이 노가다를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라는 질문이 아직 기억에 남는데, 중고등학교 때 미적분 배우는 게 사회 생활에 무슨 소용이 있나..? 라는 것과 같은 질문이라는 꼰대스러운 답변을 했던 기억이다.

당시 제출했던 과제는 LED array 로 탁구 게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만들어 보지 않은 제품을 과제로 내서 미안… 따로 제약을 두거나 하진 않았지만, PAL/PLA 로 만들어 온 제품이 가장 깔끔하게 나와서 이후 커리큘럼을 바꾸기로 결정하면서 후배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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