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컴퓨터 공학 이야기 (2) — 컴퓨터 공학과

다행히 수험생 시절 공부를 꽤 열심히 해서 과를 골라서 지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더 많은 운을 기대하며 자연스럽게 컴퓨터가 들어가는 과를 찾아 지원하였는데, 관련된 이야기 몇 가지…

컴퓨터 공학 vs 전자계산기공학

원서 접수 시 무의식적으로 다른 과 대비해서 과 이름이 멋지다는 생각을 했었다. 10대의 마음에 아마 과의 이름이 예전의 전자계산기공학이었으면 지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한국의 입시 제도는 학교와 과를 먼저 선택하고 주어지는 경쟁률에 따라 시험 성적으로 우열을 매기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당일의 운이 매우 중요했던 기억이다.

과 연혁을 보면, 1978년에 전자계산기공학과 줄여서 전산기공으로 불렸었다 한다. 당시 국립대의 학과 이름에 영어를 쓸 수 없던 규칙이 있었더랬고, 1988년 올림픽을 지나면서 조례가 바뀌어 영어 이름이 과에 허락이 되었고, 컴퓨터공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당시 이 혜택을 받은 과가 컴퓨터공학과와 산업디자인학과, 두 과 모두 이름의 버프를 받아서 당분간 각 단과대의 대표주자가 되었다고 한다. 몇 년 위 선배들은 2지망으로 의대를 내려 보내기도 하고 전체 수석 선배님도 계셨더랬다.

컴공 ? 전전제 ? 전산 ?

당시 입시 정보로 컴퓨터를 만지려면 갈 수 있는 과는 아래의 세가지,

  • 공과대학 컴퓨터공학과 — 정원 75명

  • 공과대학 전기전자제어공학과군 — 정원 270명

  • 자연과학대학 계산통계학과 전산과학전공 — 정원 30명

     

소위 과 이름의 ‘간지’를 찾아서, 그리고 적당한 인원(?)이 끌려 지원을 했고, 아마도 증원 ( 60 → 75 ) 의 혜택으로 합격을 했던 거 같다. 흐릿한 정보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둘을 반반씩 하려면 컴퓨터공학이 맞다고 하였고, 전전제의 경우 2:8 , 전산과의 경우 9:1 의 비율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비율이라 했었다.

과 이름이 주는 오해도 나름 상당해서 게임을 만들고 싶어 했던 신입생 후배들이 여기가 아닌가 해서 실망해 하던 기억들과 각종 올림피아드에서 날고 기던 아이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교수님이라며 불평을 하던 시기도 금방 왔었다. 대학 생활 중에 인터넷, PC 통신, 스타크래프트까지, 삐삐에서 핸드폰까지, 지금 돌이켜 보면 아이폰 빼고 모든 일이 벌어진 세상이었으니 그 와중에 어떤 역할을 잡았어야 하나 모두가 고민 많았었던 시기였으리라.

컴퓨터 공학부

1999년 석사 졸업하던 해까지 나는 영향이 없었지만 이후 다양한 학부 대학원의 통폐합이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자연대의 전산과와 합쳐서 컴퓨터공학부로 정리되어 왔다 ( https://cse.snu.ac.kr/greetings ). 위의 30명 전산과 동기들과 졸업 후 동문이 되었지만, 접점이 없던 탓에 사회에서 한 번씩 만나도 많이 서먹하긴 하다. 나이가 꽤 들고 멀리서 고생을 좀 하고 나서는 뭐 많이 둥글둥글해 진 것도 사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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